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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일상의 기록/지희네 이야기

장인 당신과 나 자신의 시간

by j제이디 2017. 8. 2.

* 이 글은 2017년 2월 2일, 페이스북에 썼던 글을 옮긴 것입니다. 


[전문]


1. 장인과 사위


 나는 매주 처갓집에 간다. 아내와 함께 수원의 교회를 가기위한 목적으로 가기 시작한 것이 햇수로 3년째에 접어들었다. 일요일에 잠깐 들러 인사하고 밥 한 끼를 얻어먹은 때가 많았지만 때로는 토요일에 가서 하루를 자고 오기도 했고 드물게는 금요일 밤에 가서 이틀씩 자고 올 때도 있었다. 처갓집 인사는 자꾸 미루게 된다 하여 예로부터 ‘처가집 세배는 살구꽃 피어서 간다’는 말도 있었지만 오히려 나는 처갓집 인사만 자꾸 드리고 있는 셈이다. 물론 물리적 거리가 가까운 이유도 있지만 처갓집에 가면 대접을 잘해준다 하여 ‘처갓집에 송곳 차고 간다’는 말이 있듯이 할머니와 장인, 장모의 넘치는 사랑으로 심리적 거리도 부쩍 가까워졌다. 손이 큰 할머니와 장모 덕에 송곳으로 쑤셔 먹지 않으면 꼭꼭 눌러 담은 극진한 밥상을 비우기가 쉽지 않을 정도다.


 나는 말수가 많지도 않고 말주변이 좋지도 못한 살갑지 않은 사위인데다 장인도 말수가 많지 않아 집에 둘만 있게 되는 상황은 아무래도 어색하기 짝이 없다. 그럴 때면 장인은 늘 나에게 술 한 잔을 권했다. 처음에는 장인이 그저 술을 좋아하는 애주가인줄로만 알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서먹한 사이를 풀어보려는 장인의 지혜였다. 물론 장인도 술을 좋아하고 나도 한두 잔쯤은 받아 마실 수 있으니 이만한 핑계거리를 찾기도 쉽지 않다. 장인의 몸이 지금보다 덜 불편했을 때는 서로 한잔 두잔 주거니 받거니 하다보면 서툴게 한마디씩 짧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장인과 사위의 관계가 본디 다정하지는 않은 사이라고 하지만 술 한 잔씩 쌓은 정이 이제는 처갓집 울타리만큼은 되지 않을까 싶다.



2. 853 851


 두 달 새 장인은 큰 수술을 두 번이나 했다. 그리고 근 세 달 동안을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10년 전에도, 20년 전에도 큰 수술을 했다. 지난해 11월 장인은 디스크 수술을 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 심장 수술을 했던 적이 있고 근육도 말을 듣지 않고 이제는 나이도 60을 넘긴 고장 난 몸에 또 다시 문제가 생긴 것이다. 큰 수술을 앞둔 입원날 장모도 아내도 처형도 시간이 맞지 않아 내가 입원을 함께 하게 되었다. 장인과 나는 서로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았다. 내가 무슨 위로의 말을 할 수 있겠으며 그 말이 당신에게 작은 위안이 되기나 할까. 이런 저런 검사를 마치고 의사가 수술에 대해 설명을 해줬다. 몇 개의 디스크는 제거하고 몇 개의 디스크는 협착 수술을 할 거라고 했다. 의사는 진지하고 조심스럽게 긴 시간을 할애해 설명을 해 줬지만 장인과 나의 궁금증은 단 한 가지, 수술하면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침착하게 설명을 이어오던 의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수술을 해도 보통 사람처럼, 예전처럼 걸을 수는 없다고 했다. 그래도 이 수술이 최선이라며.


 의사는 최선을 다했을 것이고 간병인도 지극정성으로 장인을 돌봤을 것이다. 무엇보다 장인 자신도 조금이라도 좋아지고 싶어 말을 듣지 않는 다리를 열심히 움직여 봤을 것이다. 그런데 퇴원 후 재활병원에서 장인은 집이 아니라 다시 수술을 위해 병원으로 옮겨졌다. 누구를 탓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때는 꼭 누구 한사람 분풀이 대상이 필요했다. 의사도 원망해보고 간병인 탓을 해보기도 하고 그 화살을 장인에게로 돌려보기도 했다. 꼭 수술을 해야만 했을까. 아내는 울며 자책했다. 의사 말대로 그때는 수술이 최선이었는데 우린 분명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는데 오히려 장인의 몸은 더 나빠지고 말았다. 길고긴 수술과 병원생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우리의 바람보다 훨씬 길고 힘든 시간이 우리 앞에 펼쳐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장인의 이 힘들고 외로운 시간을 아내가 곁에서 함께 하고 있다. 나는 고작 몇날며칠을 함께한 것뿐이지만 아내는 움직일 수 없는 장인의 손과 발이 되어주었다. 그럼에도 수술 후 심각한 선망증상에 시달린 장인은 아내에게 헛소리를 하고 욕설을 쏟아내기도 했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하지만 아내는 긴 병에 난 효녀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몸과 마음을 다해 정성껏 장인을 보살폈다. 아내와 함께 장인 곁을 지키며 나라면 장인에게 아내만큼 할 수 있을까 생각해봤지만 절대 그럴 수 없었다. 부모가 아니라 장인이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 내 부모라고 해도 나는 아내만큼 할 자신이 없다.



3. 아들 같은 사위


 나는 한 번도 장인 장모에게 ‘아들 같은 사위’가 되겠다고 말한 적이 없다.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을 수는 있으나 나의 성격상 이런 말을 누군가에게 쉽게 내뱉지 못한다. 더군다나 내게는 아버지가 없고 장인에게는 아들이 없으니 당신과 나 사이에는 ‘아들 같은 사위’라는 말은 참 어색한 말이다. 그런데 첫 번째 수술을 마친 후 장모에게서 ‘아들같이 든든하고 고맙다’는 말을 들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도 다하지 못한 나에게 너무나 과분한 말이었다.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돈을 냈고 내가 낼 수 있는 시간을 냈고 내가 드릴 수 있는 마음을 드렸다. 돈이 가장 쉽고 그 다음이 시간이고 마음이 가장 어렵다고들 한다. 아내는 더 이상 할 수 없을 만큼 했다. 나는 그 반의반도 못했지만 장인은 내게 고맙다고 했다. 심한 선망증상이 있을 때도 장인은 내가 가면 조금 나아졌고 자주 나를 찾았다고 했다. 아무 드린 것 없는 당신께 내가 고마울 따름이다.


 나는 장인이 건강하지 못하고 나이가 들었을 때 처음 만났기 때문에 장인의 젊은 시절을 모른다. 장인은 고된 육체노동을 했다. 술도 좋아 했을 것이고 아내에겐 엄한 아버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다른 사람에게 쉽게 고개 숙이지 않는 꼿꼿한 사람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강인했던 당신의 몸과 영원할 것 같았던 젊음을 가족을 지키고 자식들을 꽃피우기 위해 거름으로 다 태워버리고 이제는 이렇게 늙고 병들어 버렸다니. 아내를 보며 나는 내 부모에게 절대 아내만큼 효자가 될 수 없음을 느꼈듯이 장인을 보며 나도 아내에게 너른 품이 될 수 있을까, 나도 나의 아이들에게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장인이 살았던 시간을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다. 장인이 살고 있는 시간을 나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함께 다른 시간을 살아간다. 장인이 이제는 젊지도 건강하지도 않음이 너무나 애석하지만 장인 당신과 나 자신의 이 시간이 우리의 남은 삶 중에게 가장 젊고 건강한 날들임을 잘 알기에, 이 시간이 조금만 더디 갔으면 한다. 그리고 장인의 건강이 아주 조금만 더 좋아졌으면 좋겠다. 장모와 아내는 질색하겠지만 장인과 술 한 잔 기울일 시간이 다시 돌아온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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