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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집 : 글상자/사회와 문화

광화문에서

by j제이디 2017. 8. 2.

* 이 글은 2016년 11월 13일 홈페이지에 쓴 글을 옮긴 것입니다. 


[전문]


 2002년 6월이었다. 월드컵의 열기가 시골마을까지 달아오르게 했던 그때였다.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주말을 맞아 집으로 가기위해 안동 시내로 나왔다. 그런데 거리 양쪽으로 끔찍한 사진들이 줄지어 전시되어 있었다. ‘미군 여중생 압사 사건’ 이른바 미선이 효순이 사건이었다. 참혹한 현장을 찍은 사진은 끔찍함을 넘어 공포감마저 들게 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촛불 집회가 시작되었다. 내 생애 처음 참여해본 길거리 집회였다. 잠시 후 자신을 변호사라고 소개한 한 사람이 무대에 올라 마이크를 잡고 발언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주 짧은 발언을 했는데 그 말이 14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히 내 마음에 새겨져 있다. 당시의 화두는 SOFA(Status of Forces Agreement ; 한미주둔군 지위 협정)였다.


 “제가 오늘 발언을 하기에 앞서 인터넷에 소파를 검색해 봤습니다. 그랬더니 소파는 참 편안한 것이더군요.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소파는 미국 사람들에게만 편안하고 우리에게는 불편한 소파네요. 미국 사람들에게 편안한 소파가 우리에게도 편안한 소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느 주말과 조금 달랐던 그날의 기억은 열일곱 어렸던 나에겐 적잖은 충격이었다. 나는 경상북도 의성에서 태어났고 고등학교는 안동에서 다녔다. 보수적이라는 경상도, 그 중에서도 경북의 한복판에서 나고 자랐다. 어려서부터 어른들은 ‘그나마 이만큼 먹고 사는 것도 다 박정희 대통령 덕분이다’는 말을 하곤 했다. 그들이 그렇게 잘못된 역사를 세뇌 받은 것처럼 나도 그들의 우상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랐다. 그런 어른들에게 ‘데모’는 빨갱이들이 나라 팔아먹으려고 하는 짓이었다. 내게 미선이 효순이 사건과 그날의 집회, 그 변호사의 발언이 유독 크게 자리 잡은 이유였다.




 오늘 아내와 함께 광화문에 다녀왔다. 버스가 경복궁으로 가지 못해 사직단에서 내려 광화문까지 걸어갔다. 골목골목마다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찼다. 광화문 광장에 도착했을 때는 발 디딜 틈이 없다는 말이 딱 들어맞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다. 어릴 적 어른들이 그토록 겁줬던 ‘데모’는 축제였다. 아무 것도 모른 체 엄마 품에 자고 있던 아기들, 게임할 시간도 모자라지만 나왔다는 아이들, 공부할 시간도 쪼개가며 참여한 학생들, 아프기만 했던 청춘들, 아이들에게 더 좋은 대한민국을 물려주고 싶다던 어른들, 오늘의 현실이 미안해 눈물 흘리시던 어르신들. 모두가 모여 자신의 이야기를 나눴다.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희망을 보기도 하고. 이런 말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참 재미있었다. 우리 참 대단하구나 뿌듯하기도 했다.


 100만이 모였다고 하지만 당장 내일 아무런 변화가 없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1919년 3월 1일에 일제의 무단통치에 맞서 분연히 일어나 만세를 외쳤고, 1960년 4월 19일 이승만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부르짖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는 목숨 바쳐 민주화 투쟁을 했고, 1987년 6월 전국에서 130만이 참여해 평화대행진을 이뤄냈다. 3.1운동,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월항쟁이 바로 오늘 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승리할 때까지 싸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승리할 것이다.


 나는 반드시 우리의 역사가 지금보다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을 믿는다. 그러나 역사가 반듯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다는 것도 알고 있다. 좌우로 비틀대기도 하고 때로는 후퇴하기도 한다. 오늘 우리 손에 들었던 작은 촛불이 좌우로 흔들리는 우리의 걸음을 바로 잡아 줄 것이고 거꾸로 가는 대한민국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되리라 믿는다. 우리의 작은 용기가 서로의 가슴을 뜨겁게 하리라 믿는다.


광화문에서


2016년 11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