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B와 D사이의 C다.’ -장 폴 사르트르
인생은 태어남(Birth)과 죽음(Death) 사이의 선택(Choice)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며 그 결과들로 이뤄진다고 말합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 창세기 13:9
아브람이 조카 롯에게 다투지 말자며 선택권을 줍니다.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 창세기 13:15
롯의 선택을 따른 아브람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실존주의가 뭔지 몰라도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우리의 삶은 선택 또 선택의 연속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기준에 따라 선택을 하게 될까요.
깊이 생각하지 않더라도 답은 ‘돈’입니다.
EBS 지식채널 ‘선택의 이유’를 보면 슬픈 숫자들이 나옵니다.
‘길에서 돈을 주우면 주인을 찾아주지 않겠다.’ - 41.8%
‘부정한 입학이나 취업 제안이 들어올 경우 받아들이겠다.’ - 54%
‘부정부패를 저질러서라도 부자가 되는 것이 정직하게 사는 것보다 낫다.’ - 40.1%
앞만 보고 달린 급속한 경제성장은 IMF 앞에 주저앉았고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는 성공만을 갈망합니다.
제품처럼 기계화된 학생들은 스펙으로 분류되어
돈을 버는 기계가 되기 위해 취업만을 강요당합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무한경쟁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돈’을 쫓아야지 ‘양심’을 따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자식 하나를 키우기 위해서는 3억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그 자식은 등록금에 취업난에 주거난으로 삶이 팍팍합니다.
어쩌면 우리 삶이 ‘돈’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양심’을 버리고 ‘돈’을 선택하는 것이 정당화 될 순 없습니다.
양심 대신 돈을 선택하는 것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님께 또 선생님께 그러게 하라고 배우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우리’ 학교에서는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Why not Change the World
우리는 세상을 바꾸자고 배웠고
‘지성’과 ‘영성’과 ‘인성’을 갈고 닦았습니다.
‘훈련’이 아니라 ‘도덕성과 가치관’을 교육받았고
‘양심’에 따라 내 것 이상의 것을 욕심내지 않았습니다.
‘명예제도(Honor Code)’에 따라
정직하고 실력 있는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정직하게 살면 손해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들의 부정과 비리는
이 생각을 더욱 공고히 해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거짓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한 사람을 오래 속일 수도 있고
많은 사람을 잠깐 속일 수도 있지만
많은 사람을 오래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자신의 양심을 어떨까요.
공허한 가슴은 욕망으로 다 채우지 못합니다.
채우려 하면 할수록 더욱 공허함을 느낍니다.
느린 것 같아 보여도 정직하게 가는 것이 빠릅니다.
더딘 것 같아 보여도 양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잘 사는 삶이란 자식들이
정직, 공정, 배려를 생각할 때
당신을 떠올리는 삶이다.”
미국 작가 H. 잭은 브라운 주니어
우리는 자식에게 무엇을 유산으로 물려줘야 할까요.
부정축재로 위장 전입한 다운 계약서의 집문서일까요
아니면 정직을 떠올리면 부모를 생각하게 하는 것일까요
이제 우리 삶을 채우는 선택의 기준이 확실해 졌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그 순간의 선택이 우리의 삶을 바꿔놓습니다.
그 선택은 순간의 유혹에 이끌려서는 안 되며
우리의 양심에 따라 정직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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