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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일상의 기록/지희네 이야기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집

by j제이디 2017. 8. 26.

 나는 아주 큰 과수원이 있는 집에서 태어났다. 개나 소 같은 가축들도 있었고 과수원에서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몇 칸의 계단을 올라야 했고 집 앞으로는 작은 강이 흐르고 있었고 집에는 아버지도 있었다고 했다. 전혀 기억나지 않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 집은 참 따뜻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린 딸과 더 어린 아들을 혼자 키워야 했던 엄마는 이사를 결심했다. 그 큰 과수원을 혼자서 가꿀 수는 없지 않았던가. 내가 태어난 집에서 불과 1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집으로 이사했고 우리를 키우기 위해 엄마는 지척에 초등학교가 있는 새로운 집에서 작은 문방구를 시작했다. 문방구, 부엌, 방 한 칸에 작은 뒷마당이 있는 시골집. 엄마는 지금도 여기에 살고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쭉 같은 모양의 집에서 자랐다. 이 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다름 아닌 '쥐'였다. 8,90년대 시골집들이 다 그러했겠지만 우리집에도 쥐가 있었다. 집안 곳곳에는 쥐를 잡는 끈끈이가 있었고 밤에 자려고 누우면 쥐들이 천장을 뛰어다니는 무서운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그때의 기억들 때문에 지금까지도 쥐는 무서운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웬일인지 시골 동네에 새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특별히 우리집 앞의 두 집은 이층집을 짓기 시작했고 우리도 빨간 벽돌의 이층집을 짓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어떻게 이 큰 집을 지을 생각을 했는지 참 대단하기만 하다. 그렇게 나의 유년시절의 추억을 간직했던 작은집이 허물어지고 크고 멋진 이층집이 세워질 몇 달 동안 우리는 옆집에 살고 계시던 노부부네 단칸방에 신세를 져야했다. 그야말로 단칸방이었다. 


 보잘것없는 가재도구 몇 가지를 옮겨다 놓고 엄마와 누나, 나 이렇게 세식구가 누우면 가득 차는 작은 방이었다. 그리고 이 방 옆에 길가로 한 평 남짓 작다란 공간이 있었는데 여기를 임시 문방구로 사용했다. 그 작은 공간에 학용품도 몇 가지 군것질거리도 몇 가지 요란하지 않게 놓아두고 장사를 했다. 단칸방에 신세를 지고 있었기에 부엌도 욕실도 따로 없었고 마당 한구석에 낮은 수도꼭지가 하나 있었다. 어린아이들이 다 그랬겠지만 이 집에서는 더 씻기 싫었던 기억이 난다. 추운 바깥바람 맞아가며 씻는 것이 어린 나에겐 꽤나 고역이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고 그 사이 새집이 생겼다. 


 새로 지은 이층집은 참 좋았다. 1층엔 문방구가 큼직하니 자리 잡았고 엄마방과 부엌, 작은 화장실이 있었고 한참을 뛰어다녔던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어디서 소리쳐도 다 들리는 집이었지만 1층과 2층엔 인터폰이 있어 재미삼아 한 번씩 인터폰을 눌러보기도 했다. 2층에는 큰 거실과 욕실 그리고 큰 방과 작은 방이 있었다. 큰 방에 비해서 반도 안 될 작은 방이 내 방이었다. 내 방이 생겼다고 좋아했다가 누나 방보다 작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 신세졌던 단칸방 만한 내 방이 생겼는데도 말이다. 



 어린 시절 시골집에는 담이 없었다. 앞집, 옆집, 뒷집 할 것 없이 서로 숟가락이 몇 개인지 다 알정도로 그렇게 친했다. 친구 집에는 아무 때나 불쑥불쑥 들어갔고 친구가 없어도 어른들과 함께 밥도 먹고 놀기도 했다. 우리집에도 친구들이 많이 놀러왔다. 이젠 쥐도 안 나오는 새집이라 무서울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었다. 엄마는 지금도 이 집에 살고 있다. 


 나는 고등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집을 떠나게 되었다. 3년간 기숙사 생활을 했고 토요일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왔고 토요일 오후 4시부터 일요일 오후 4시까지 정확히 24시간만 우리집에 있게 되었다. 한 번도 집을 떠나본 적이 없던 내가 고등학생이 된 이후로는 늘 집을 떠나 살아오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는 한 시간이면 집에 올 수 있었는데 대학교를 가게 되면서 버스에 기차에 서너 번은 갈아타야 겨우 집에 올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게 나이들어 간다는 것은 점점 집에서 멀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번은 갔던 집을 한 달에 한번 가게 되었고 이제는 서너 달에 한번 가게 되었다. 


 스물네 살이 된 대학교 3학년 때부터는 기숙사를 떠나 자취를 하게 되었다. 보증금 200만원에 월세 28만원. 이때부터 시작된 남의 집 살이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내 집에만 살았기 때문에 남의 집에 산다는 게 익숙지 않았고 큰 집에 살았기 때문에 원룸에 생활하는 게 불편했다. 그런데 이제는 매년 이사하는 게 당연한 일이고 좁은 원룸에서도 편하게 잘 살수 있다. 


 대학교때 까지는 그나마 저렴하게 집을 구할 수 있었지만 서울로 올라오면서는 얘기가 달라졌다. 갑자기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 오갈 데가 없어진 나는 친구가 살고 있던 고시원에 얹혀 살게 되었다. 화장실도 공동으로 사용하는 2평짜리 좁은 방에 침대 하나를 두고 내다볼 일 없는 작은 창문 하나가 있는 집이었다. 크지도 않은 내가 팔다리도 채 못 뻗고 자는 작은 집에서 한 달 반을 살았다. 그리고 월급날 기분 좋다며 친구에게 한턱을 내고 신나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고시원 주인아저씨에게 들켜 그날로 집에서 쫓겨나야만 했다. 그 운수 좋았던 날에 그야말로 오갈 데 없이 서울 바닥에 나앉게 된 것이다. 짐이랄 것도 없었던 나는 일주일을 회사 근처 찜질방에서 잤다. 매일 큰 가방을 메고 출퇴근을 했고 주말이 되어 바로 고시원을 구했다. 


 고시원을 구하는 조건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욕실이 방 안에 있을 것, 또 하나는 방 안에 창문이 있을 것. 몇 군데 고시원을 돌아보고 계약한 3평짜리 고시원은 월세가 39만원이었다. 주인은 30만원대에 이런 집이 없다고 했지만 나는 내가 이런 집에 살게 될 거라고 이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게 점점 집은 작아져만 갔고 고시원 그 작은 방에 누우면 별안간 외로움이 몰려왔다. 그런데 그 외로움보다 더 무서웠던 것은 내 꿈도 이 방처럼 작아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었다. 그 두려움은 네 달이나 더 지속되었다. 



 부산, 봉화 등 지방으로 발령받으며 싼값에 원룸을 구해서 생활했다. 그리고 3년 만에 다시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고 이번에도 한동안은 친구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리고 몇 달 후, 결혼을 앞두고 아내와 조금씩 돈을 모아 작은 원룸을 마련했다. '서울'이라고 하면 나에게는 고시원, 친구 집이 전부였는데 작지만 우리집이 생긴 것이다. 물론 집주인도 따로 있고 집이래야 방이 전부이다 시피 했지만 10년 만에 서울에서 두 팔 두 다리를 뻗고 편히 잘 집이 생겼다. 그리고 우리의 행복이 우리집의 크기에 있지 않으며 우리 삶의 성공이 우리집의 높이에 있지 않음을 아는 사랑하는 아내가 생겼다. 


 매년 이사를 다녀야 했는데 이 집에서는 2년을 살았다. 지나고나니 모든 것이 행복이었다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집에서 아내와 정말로 행복하게 살았다. 작은 방을 행복과 추억으로 채워가며 슬픈 날의 눈물도 감싸 안고 기쁜 날의 눈물도 함께 흘리며 우리의 시간을 쌓았다. 어디서든 행복할 수 있음을 언제라도 사랑할 수 있음을 배운 성숙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했다. 


 새로 이사한 집은 반지하지만 방이 2개나 있고 분리된 거실도 있다. 고시원과 원룸을 전전하던 지난 10년 동안 방에 문이 따로 있는 집에 살았던 적이 거의 없는데 참으로 오랜만에 그런 집을 갖게 되었다. 2년을 살았던 집에서 지금 집으로 이사 오던 날, 내 친구들과 아내 친구가 이사를 도와주겠다며 집으로 찾아왔다. 우리집이 크지 않지만 이렇게 큰 도움을 주는 친구들이 곁에 있음에 기쁜 날이었다. 이정도면 꽤나 잘 살아왔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었다. 


 전에 살던 집보다 몇 평 넓지 않은 집인데 집이 엄청 커 보인다. 처음 이사를 하고 며칠간은 '집이 너무 커서 걱정'이라는 둥 아내와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할 정도로 체감상 집이 아주 넓어졌다. 물론 그럼에도 우리보다 훨씬 좋은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주 많고, 이 집도 살다보면 좁게 느껴질 날들도 곧 오게 될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2년 전에 함께 썼던 혼인서약서에 남긴 말이 그 무엇보다도 소중함을 더 잘 알고 있다. 


"우리집이 좀 낡았어도 내 옆에 누운 사랑스러운 당신을 보며 만족하겠습니다."


 요즘 참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