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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집 : 글상자/사회와 문화

문재인과 최동원, 두 남자 이야기

by j제이디 2017. 8. 2.

* 이 글은 2016년 12월 5일 홈페이지에 쓴 글을 옮긴 것입니다. 


[전문]


– 문재인 : 1953년 1월 24일, 경남 거제 출생. 1968년 경남고등학교 수석 입학.

– 최동원 : 1958년 5월 24일, 부산 출생. 1974년 경남고등학교 입학.


 문재인과 최동원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다섯 살이지만 생일이 빠른 문재인이 학교를 일찍 들어가 학년으로는 6년 차이가 납니다. 두 사람은 6년 차이로 입학한 경남고등학교를 매개로 첫 인연을 맺게 됩니다. 1968년, 문재인은 당시 한강 이남의 최고 명문으로 불렸던 경남고등학교를 수석 입학합니다. 1974년, 경남고등학교에 입학한 최동원은 경남고 시절 이미 전국구 투수로 유명했는데, 일례로 경남고 2학년이던 1975년, 경북고와의 경기에서 노히트노런, 이튿날 선린상고와의 경기에서 8회까지 노히트노런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이 두 사람 모두 경남고 시절부터 이미 각자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 이야기 1. 구치소에서 들은 우승 소식


 문재인은 학생운동을 하며 두 차례 구치소에 수감된 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경희대 법대 시절 총학생회 총무부장으로 집회를 주도하다가 1975년 4월 11일 구속되어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구치소에서 약 4개월 생활한 문재인은 징역 10월에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됩니다. 두 번째는 군 전역 후 1980년 신군부의 5.17 내란 때 복학생협의회 활동으로 문제가 되어 계엄령 위반으로 구속 되면서 청량리 구치소에 수감됩니다.


 “문재인이 구치소 수감되었을 때 김정숙 여사가 경남고가 우승했다고 신문을 들고 왔다.”


 한 때 커뮤니티에서 많이 회자되던 이야기입니다. 특히 당시 경남고를 우승시킨 선수가 최동원이라는 이야기도 함께 나왔습니다. 최동원이 경남고 투수로 활약하던 시기(1974년-1976년) 경남고의 주요대회 우승 기록을 보면 1976년 청룡기 우승이 있습니다. 하지만 문재인이 1975년 8월 육군에 입대해 날짜가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특전사 복무 시절 최동원이 이끈 모교 경남고의 우승 소식을 들었다는 말이 맞을 것입니다.


 그리고 1980년, 문재인이 두 번째로 구치소에 수감되었을 때 경남고는 제2회 야구대제전에서 우승을 기록합니다. 하지만 당시는 이미 최동원이 경남고를 졸업하고 난 후의 이야기 입니다. 이래저래 최동원이 경남고를 우승시킨 소식을 문재인이 구치소에서 신문을 통해 접했다는 것은 시기가 조금 어긋나 보입니다. 물론 전국대회가 아니라 소규모 대회였을 수도 있고 소문이 와전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문재인은 야구광이었습니다. 문재인은 야구를 좋아했고 실제로 잘 하기도 했습니다. 경희대 재학시절 학년 대항 야구시합에서 주장을 맡아 팀을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습니다. 문재인이 군대에서 혹은 구치소에서 후배 최동원 선수의 활약과 모교 경남고의 우승 소식을 듣고 기뻐했을 것은 분명합니다.



▶ 이야기 2. 선수협과 인권변호사


 1988년, 해태 타이거즈 투수였던 김대현은 교통사고로 27살의 나이에 사망하게 됩니다. 이 사건을 지켜본 최동원은 선수 복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프로야구 선수협의회를 결성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프로야구 구단의 강력한 반발에 밀려 선수협 결성은 실패로 돌아가고 최동원은 오히려 롯데에서 삼성으로 트레이드 됩니다. 이 과정에서 선수 생활에 회의를 느낀 최동원은 1990년 시즌 후 33살의 젊은 나이에 은퇴를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최동원이 주도한 선수협 결성이 무산되기는 했지만 이 과정에서 고문 변호사로 큰 도움을 준 것이 바로 문재인 변호사 였습니다. 당시 노동운동 전문 변호활동을 했던 노무현, 문재인 변호사가 부산지역 노조 자문은 거의 다 했고, 선수협도 노조 활동이라 생각하고 큰 도움을 줬던 것입니다. 한편, 다음카페 소울드레서의 한 사용자가 당시 노무현, 문재인 법률사무소의 명함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명함에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법을 잘 모르거나 돈이 없어 애태우는 근로자’를 도왔던 당시의 활동이 적혀 있고 상담료도 받지 않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건강한 사회를 향한 새정치의 강속구”


 최동원은 은퇴 후인 1991년, 부산 서구 광역의원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습니다. 당시 최동원의 경남고 선배였던 김영삼의 민자당에서 최동원을 노렸지만 이를 거부한 최동원은 오히려 “대선배(YS)의 3당야합 부도덕성을 선거로 심판하기 위해 출마했다”며 YS 심판카드를 들고 민주당 공천을 받은 것입니다. 결과는 공고한 지역구도의 벽에 막혀 당연히 선거에서 낙선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민주당 간판으로 YS에 맞서 부산에서 무려 37.8%를 득표했는데, 이는 탄핵 역풍이 불었던 2004년 조경태 후보가 39.13%를 득표하며 당선될 때까지 최고 득표율 기록이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조차도 국회의원, 부산시장 선거에서 이보다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지 못했습니다. 한편 이 선거를 계기로 최동원은 자신을 민주당으로 영입한 노무현과도 인연을 맺게 됩니다.




 1980년대 후반 이미 연봉 1억을 받는 최고의 선수였던 최동원. 주위의 만류와 강한 반발을 무릅쓰고 어려운 동료 선수들을 돕기 위해 선수협 결성을 도모했고, 부산일보 파업현장에 롯데 유니폼을 입고 당당히 찾아가 100만원을 후원하기도 했습니다. 최동원은 은퇴 후에도 자신의 신념대로 살았고 삶으로 우리에게 자신의 신념을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문재인과 노무현이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부산, 야구, 그리고 사람. 문재인과 최동원, 두 남자의 이야기에 이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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