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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집 : 글상자/일상 및 기타

[2012년 11월 30일] 나를 닮은 아이

by j제이디 2013. 10. 11.

 

 

 

 

 사회복지에서 감정이입(empathy)라는 말은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사용됩니다. 우선은 사회복지사가 클라이언트에게 전적으로 공감하고 이해하는 자세를 취하면서 클라이언트의 마음을 열어 숨겨두었던 이야기를 하게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사회복지사가 자신의 과거 경험을 클라이언트에게 지나치게 이입하고 감정이 몰입되어 클라이언트의 말을 마음열고 듣기보다 자신의 감정이 앞서는 부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다수의 경우에는 이 두가지 감정이 혼재되는 양가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교과서에서 쉽게 문자적으로 배웠던 이론들이 실제로 적용되면서 사회복지사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실천하는 것의 괴리를 분명하게 느끼게 됩니다. 오늘 만난 한 아이, 그 아이의 이야기를 짧게 들려드리려 합니다.

 한 아이가 있습니다. 아직 십대의 어린 아이인데, 부모는 이혼한지 10년이 넘었고, 부모 모두 아이를 책임지지 않았습니다. 버려진 아이는 할머니에게로 맡겨졌습니다. 고령의 할아버지가 한달 내내 일해봐야 받는 돈은 겨우 80만원 남짓. 이 돈으로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이서 생활하기도 빠듯한데, 아이와 아이의 동생까지 있습니다. 그리고 약간의 지적 장애 증상을 보이는 고모도 둘이나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일하러 하루 종일 집을 비우면, 허리가 불편하신 할머니의 대소변을 이 어린 아이가 받아냈습니다. 하지만 불평한번 없었던 이 착한 아이.

 어려서부터 밝고 착하게 자란 아이. 그러나 아이와 동생이 커가면서 그 비좁은 집에서 언제까지나 할머니의 대소변을 받아내며 살 수는 없었습니다. 다행히 주변 교회의 도움으로 한 성도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지만, 여기도 마음 놓고 지낼 수 있는 곳은 아닙니다.

 아직 고등학생인 이 아이는 자신과 동생의 생활비를 벌기위해 낮에는 학교를 다니면서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아직 어린 이 아이가 식당부터 공장까지 여러 차례의 아르바이트 경험이 있고, 지금 하고 있는 공장 아르바이트는 새벽 늦게나 끝나서 몸은 고되기만 합니다. 하지만 아직 어린 동생과 자신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이 아이는 아무 불평도 불만도 없이 그저 일이 있음에 감사하며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여러 사람과 함께 만나서를 이 아이의 진솔한 속내를 들을 수 없을 것 같아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 둘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습니다. 아이는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에는 막힘이 없었지만 가족의 이야기가 나오면 눈치를 살피기도 했고, 이야기를 회피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먼저 저의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은 20년도 더 된 아주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나는 늘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살았지만, 가끔, 아주 가끔은 아버지가 그리울 때가 있어. 가끔은 그 빈자리가 아주 크게 느껴지더라..."

 이렇게 시작된 저의 고백에 이 아이도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하나씩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처음 시작할 땐 당연히 사회복지실천기술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그냥 숨김없이 내 이야기를 시작했을 뿐입니다. 다행히 이 아이는 나의 말을 귀가 아닌 가슴으로 들어주었고, 우리는 그렇게 항상 웃고 지내고, 항상 착하다, 열심히 한다는 칭찬을 받으며 마음 한편으로 숨겨야만 했던 우리의 아픔들을 공유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어린 이 아이에게서 지난 날 나의 아픔을 보았고, 어쩌면 이 아이는 나의 모습을 보며 작은 위안을 얻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늘 밝고 착한 아이, 그 아이에게도 아픔이 있습니다. 아니, 우리가 늘 밝고 착하다는 칭찬만 하며 지내는 동안 그 아이는 자신의 아픔을 이야기할 시간조차 갖지 못했습니다. 아이는 자신이 아프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늘 불평불만없이 착하게 자랐다는 우리의 그 말때문에 아무말 하지 못하고 자신의 아픔을 혼자서 견뎌야만 했습니다.

 아직 어린 아이입니다. 그런데 10년이 넘는, 자신의 삶의 반 이상을 다른 집에서 눈치보며 살아야 했습니다. 최근 몇년간은 밤새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벌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내 아픔을 이야기할 시간조차 빼앗겨 버린 아이. 이 아이의 꿈은 무엇일까요?

 "돈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할머니 허리 수술도 해주고, 동생 학교도 걱정없이 보내고, 그리고 우리 집도 마련할 수 있잖아요."

 아직 너무나 어린 이 아이가 돈이 좀 많았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하나도 자신을 위한 것이 없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아픈 할머니의 대소변을 받아내야 했던 아이가 할머니 걱정부터 합니다. 돈이 없어 자신의 미래도 불투명한 아이가 동생을 먼저 걱정합니다. 그리고 나서 아주 작은 '우리' 집이 있으면 그러면 더 바랄게 없다고 합니다.

 너무 일찍 커버린 이 아이를 보며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나도 힘들지 않다고, 당연히 내가 돈을 벌어서 동생 챙겨야 된다고 말하는 그 모습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밝은 아이가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도 너무 힘들었다고 말할 때 내가, 우리가, 또 이 사회가 이 어린 아이에게 무엇을 해주었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우리 주위엔 아픔이 많이 있습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눈감고 그 아픔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어린 아이처럼 또 많은 사람들은 아픔을 간직한 채로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같이 아픔을 나누는 것은 어렵습니다. 몸도 마음도 힘듭니다. 하지만 이 아이처럼 우리 주위엔 우리의 진심어린 따듯한 말 한마디, 건네는 손길 한 번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부디 우리 주위의 아픔을 외면하지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내가 눈 감고 입 닫고 귀 막는 그 순간에도 힘들어 지쳐 쓰러져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같이 아파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함께 아파하겠습니다. 당신의 아픔을 기꺼이 나누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