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후에 나는 매주 지희와 함께 교회를 가기 위해 수원에 다녀온다. 어제도 주일이었기 때문에 아침 일찍 집을 나서 기차를 타고 수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예배 후엔 늘 처가에 들러 아버님께 인사를 드리고 때론 저녁까지 먹고 오기도 한다. 어제도 그런 평범한 주일이었다. 단, 날씨가 너무 추웠다는 것만 빼고는.
[제이디]라는 이름으로 운영하던 페이스북 페이지를 결혼 후에 [지희남편]으로 바꾸고 소소한 이야기들을 가끔씩 올리곤 한다. 지난주, 교회에서 정식 등록교인이 되었다는 축하 꽃다발을 받은 것을 기념해서 지희와 할머니의 사진을 찍어 지희남편 페이지에 올렸다. 그리고 지구 반대편 저멀리에서 지희도 잘 몰랐던 삼촌과 고모께서 페이스북을 통해 연락을 주셨다. 아버님과 어머님, 할머니께 댓글들을 읽어 드리고 몇몇 사진들을 찾아 보여드렸다. 안경을 안방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던 아버님이 급히 돋보기를 꺼내 사진을 이리 저리 돌려 보신다. 수십년도 더 된 빛바랜 사진을 보며 '말도 참 안듣던 뺀질이 창일이'와 '아버님을 졸졸 따라 다니던 사촌 동생 복순이' 이야기를 어린 아이처럼 신나게 말씀하신다. 미국에 계신 분들께 페이스북을 통해서 사진도 보내고 안부도 전할 수 있다고 말씀을 드리자 동생들에게 보낼 사진 찍기가 시작되었다.
머리가 너무 허옇게 세었다며 모자를 쓰고 찍자고 하신다. 얼굴이 너무 어둡다며 다시 찍자고 하신다. 너무 살이 쪘다고 다시 또 다시. 사진을 안찍겠다고 이것들이 뭐하나 돌아보시던 할머니까지 어머님과 아버님 사이에 자리한 가족 사진은 그렇게 탄생했다. 소소한 일상이 가져다주는 작은 선물이다. 찍은 사진과 연락처를 쪽지로 전달드렸다. 삼촌이 계신 곳은 새벽 2시라고 말씀을 드렸지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답장이 왔냐고 몇번이나 묻고 또 되물으신다. 이제 페이스북 계정을 만들어 직접 연락하시겠노라, 동생들에게 편지를 보내겠노라 연신 싱글벙글이시다. 그렇게 소소하지만 특별한 시간을 뒤로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갈 시간이다. 3,40분씩 연착하는 기차를 보며 '북극 한파'를 처음 온 몸으로 실감했다.
집에 도착한 어제 밤, 추위를 더욱 실감할 사건이 벌어졌다. 씻으러 들어간 지희가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는다며 큰일난 표정을 하고 나오는 것이었다. 불과 몇 분 전에 수도가 동파되었다며 드라이기로 수도관을 말린다는 아름이의 연락을 받고 뭐 그런 일이 다있냐고 했던 우리에게 뭐 이런 일이 다일어난 거다. 내일 일찍 출근해서 준비할 일이 많은데 아직 자료를 다 받지도 못했는데 어떡하냐며 걱정이 시작됐다. 그렇게 '내일 걱정'으로 시작됐던 우리의 이야기는 새벽 2시를 맞도록 이런 저런 다른 이야기들로 화제를 옮겨갔고, 결국 내일 새벽에도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으면 회사 근처 사우나에서 씻고 출근을 하자는 것으로 우리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그런데, 새벽 2시에 나오지 않는 물이 새벽 4시 반이 된다고 나오겠냐고, 어차피 나는 사우나를 따라가야 되는게 아니냐며 되물었지만 지희는 웃기만 할뿐 아무 말이 없었다.
아직 어두운 새벽 5시, 결국 우리는 집을 나서 아직 다니지 않는 첫차 대신 택시를 잡아타고 마포로 향했다. 지희네 회사 앞 24시 사우나는 나에게도 추억이 많은 곳이다. 4년전, 인턴 생활을 하기위해 처음 서울에 올라왔고, 급한대로 혼자 눕기에도 비좁은 하태인네 고시원에 함께 살게 되었다. 첫 월급을 타 기분 좋은 마음에 하태인에게 저녁을 사고 기분 좋다며 함께 고시원으로 들어가던 길, 주인 아저씨에게 걸려 다음날로 바로 고시원에서 쫒겨났던 적이 있었다. 없이 사는 것이 얼마나 비정한가, 나는 돈을 많이 벌면 저렇게 살지 않으리라 이를 갈며 슬피 울던 일주일, 바로 이 사우나에서 일주일을 생활했다. 그렇게 익숙한 사우나를 4년 만에 다시 찾았고, 사우나를 마친 우리는 어제 밤부터 사우나 끝나기까지 지희가 열번은 족히 말했을 해장국을 새벽 6시 30분에 마포에서 먹게 된 것이다. 그렇게 지희는 젓가락을 손에 꼭 쥔채로 경건하게 해장국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든든한 밥을 다 먹도록 여전히 해는 뜨지 않았고, 지희를 데려다 주고 카페에 앉아 일기를 다 쓰기 까지도 여전히 해는 뜨지 않고 있다. 어제도 긴 하루였지만 오늘은 더욱 긴 하루가 될 것 같다.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 하나로 십수년 만에 지구 반대편의 동생들에게 연락이 닿게 되고, 연락을 이어가기 위해 이리 저리 사진도 찍어보고, 북극 한파에 걱정이 가득했지만 밤이 늦도록 지희의 걱정들을 함께 이야기 할 수 있었고, 덕분에 너무 이른 분주한 아침을 맞았지만 택시 안에서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시라는 인사도 받게되었고, 수십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을 고시원과 사우나 생각도 나는 그런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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